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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강아지와 나

문학/논문

by 혜_ 2024. 5. 1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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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화'의 가능성 -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 읽기]


사이보그 선언 > 반려종 선언

 

1. 비인간 동물 타자의 시선: 데리다와 '동물의 문제'

 

발가벗은 자신 앞에 나타난 고양이의 시선과 그것과 따라오는 수치심

> 동물의 시선을 인식하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느낌

> 절대적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

 

해러웨이는 데리다가 동물의 시선으로 단지 성찰만 할 뿐,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겨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현

"그는 고양이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고, 느끼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지, 혹은 그 아침 그를 돌아보면서 그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관해 구금해 하지 않았다. (...중략...) 호기심 없이, 그는 가능한 초대, 다른-세계화(other-worlding)로의 초대를 놓쳤다.

 

2. '반려종'과 함께 하는 세계 - 해러웨이와 '반려종 선언'

 

공생발생(symbiogenesis)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음

 

'반려종 선언'

(1) '개와 인간의 반려관계 경험을 바탕으로 종들 간의 확장된 '소중한 타자성'의 윤리와 정치를 만들어가는 문제'

(2) '개-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문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문제'

 

해러웨이는 ''반려종'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복잡하고 혼탁한 자연문화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함

이분법적 사고 체계에 반대

순수한 자연 그 자체는 없다, 함께 섞여가고 변화하는 것이 자연 그 자체

 

해러웨이가 언급하는 소중한 타자(significant other)은 보통 반려자를 지칭하는 용어,

이 용어가 동물에게 쓰인다는 점에서 소중한 타자가 항상 '동종이나 동류일 필요가 없다'고 말함

 

'미리 구성된 주체나 객체는 없으며, 단일한 근원이나 단일한 행위자, 최종 목적과 같은 것은 없다.'

 

'서로 다른 종들이 만나 반려가 되는 일, 그리고 그를 '소중한 타자'로 받아들이는 일은 창발적(남이 하지 아니하거나 모르는 것을 처음으로 또는 새롭게 밝혀내거나 이루어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sf에나 나올 법한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모험이자, 끊임없는 노력과 우습고 비극적인 실수를 자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남의 살점으로 존재하며, 서로 먹고 먹히고, 소화불량에 걸리다가,(...중략...) 지구상에서 살다 죽는 접합체이다.'

 

3. 동물의 고통과 반려종의 책임

 

데리다: 죽이지 말라(thou shalt not kill)

해러웨이: 죽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지 말라(thou shalt not make killable)

 

데리다의 죽이지 말라는 명령,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세계 곳곳에는 이미 동물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막지 못한다.

그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던 마땅한 이유들을 무시할 순 없다.

도덕적 책임이란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es-ability)에서 자라난다.'

동물 역시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그저 '잔인성을 최소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일방적인 동정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포함'해야 한다.

>> 우리는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을 공유하는 책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인간 존재들이, 단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고 있는 소중한 타자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실제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해러웨이가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생명정치의 강령은, "끝없는 실패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더 잘 살고 잘 죽기, 최대한 잘 기르고 잘 죽이기"이다.'

 

4. '다른 세계화'를 위한 이야기 - '친족 만들기'

 

앞서 언급한 윤리적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언급하고, 인간만이 아닌 아예 다른 존재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갈 것을 주장한다.

 

인류세(anthropocence), 인간에게만 닥친, 인간 세계에만 존재하는 재난인가?

툴루세(chthulucence),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에 있는 시대'

인간만을 생각하는 방식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야 하고, 우리는 이것을 바꾸어야만 한다.

 

다른 세계화를 위해서 해러웨이는, 친족을 만들라고 주장.

'가족, 혈통, 조상, 계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낯설어지는(defamliarizing), 친족만들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려종들을 친족으로 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다양한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친족을 만드는 것.

 

 

구성(ex. 주체, 객체) 위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위주로 보는 것이 출발이다.

 

-

 

저번학기에 소설 수업 들으면서 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라는 소설을 본 적이 있는데, 그거 읽어보면 어른들이 개를 어떻게 보던지가 잘 나와있다. 이런 시절이 1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 집 두부를, 초코를 우리 집 막내로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궁금해진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던데 가치관이 바뀔 수도 있지..^_^

(사실 50년도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이 1948년에 나오고 우리는 벌써 2024년을 살고 있다.. 말도 안됨.. 2020년대라라는 이 시간이 너무 낯설다;)

 

AI가 나오면서 인간중심주의가 완전히 뒤집히려고 하는데, 그 상황에 잘 맞는 철학적인 사고가 아닐까 싶다. 우리 학교가 추구하는 기조가 이러한 사고가 되다보니 국문과 교과과정에 인공지능에 대한 수업이 들어가있기도 하고 그런 것 같다,,

여자라는 타자성에서 인간 외의 존재라는 타자성으로 넘어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 같기도 하고!

저의 배움이 부족하긴 하지만.. 짧은 생각으로 이렇게 적어봅니다..

 

사실 해러웨이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데, 바로 김초엽이다.

김초엽이 엄청 빵 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거기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말한다.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중략)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아무튼 그래서 저번 학기 수업에서 다루었던 김초엽 작가를 내가 다루고 싶은 방향으로 다시 더 다루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의 선행으로 해러웨이 반려종 선언을 정리한 논문을 읽어봤다.

문학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철학도 궁금해지는 것 같다.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항상 고민이 된다... 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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